1. 영향받기를 배우는 신체들
심리학에서 “똑똑한 한스 효과”는 실험자의 기대와 행동이 피험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용어의 유래는 20세기초 독일 베를린에서 산수문제에 척척 답을 하는 4살짜리 말 한스로부터다. 그는 오른발로 땅을 구르는 방식으로 질문에 답했다. 이 말의 놀라운 능력은 삽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한스의 묘기가 써커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속임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베를린 짐나지움의 수학교사였던 한스의 주인, 폰 오스텐은 교육위원회에 이를 조사 해 달라고 의뢰했다. 써커스계, 심리학계 등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13명의 조사위원들이 면밀히 조사를 했지만 한스의 산수풀이에서 어떤 속임수의 정황도 발견할 수 없었다. 주인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한스는 조사위원들의 질문에 성공적으로 대답했다.
이 신기한 현상의 의문이 풀린 것은 심리학자 오스카 풍스터(Pfungst)의 실험에 의해서다. 산수에 필요한 개념적 지능을 말이 가질 리 없다고 생각한 풍스터는 한스는 어떤 식으로든 질문자의 비의도적인 신호를 받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시험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질문자가 답을 모르면 비의도적인 신호를 방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가설은 적중했다. 한스는 질문자들의 몸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한스로부터 성공적인 답을 이끌어 내는 질문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말에게 문제를 주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몸과 머리를 앞으로 살짝 구부렸고(아마도 말의 발에 주목하느라 그랬을 터이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한스의 발구르기 횟수가 정답에 도달하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아래로 구부렸던 머리와 몸통을 바로 세웠다. 한스는 이 신호를 읽은 것이다. 이는 “똑똑한 한스효과”라고 명명되었고, 이후에는 말하는 유인원이나 지능적인 까마귀에 대한 증언을 기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유인원이나 까마귀가 실제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자의 비의도적인 신호를 읽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벨기에의 심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벵시안 데스프레(Vincian Despret)는 <우리가 돌보는 몸: 인간-동물-발생의 모습들(“The Body We Care For: Figures of Anthropo-zoo-genesis”)>에서 풍스터의 연구를 다시 읽는다. 풍스터의 연구는 말 한스가 셈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스는 사람의 몸을 읽었다. 통상 말은 사람의 몸을 읽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령 기수가 등을 곧추세우면 말은 달리기를 멈추고 구보를 시작하는 식이다. 풍스터는 한스가 보통 말과 다른 점은 사람의 몸을 읽는 근운동 감각을 시각으로 전환한 데 있다고 했다. 그는 피부 접촉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 읽었다.
풍스터는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말의 능력을 포착했지만 영향을 주는 쪽은 사람이지 말이 아니다.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영향을 주는 쪽이고 비인간은 영향을 받는 쪽이라는 것이 통념이 여기서도 작동하는 셈이다. 그러나 데스프레는 동물행동학자 장 클로드 바리(Jean-Claude Barrey)가 말한 ‘이소프락시스(isopraxis)’를 참조하면서 과연 누가 인간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가르쳤을까를 묻는다. 이소프락시스는 서로가 서로의 신체에 의해 조율되어 상대의 움직임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말이 기수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기수가 말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스 질문자들의 행동의 공통점, 정답에 이르러서 긴장을 풀고 머리와 허리를 들어올리는 행동을 가르친 것은 말 한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풍스터의 연구에서 어떤 질문자들은 처음에는 한스로부터 좋은 답변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실패했고, 또 다른 질문자들은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질문자들은 “그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스가 어떤 신호에 민감한지를 배워야 했다.” 인간들이 한스를 답으로 이끄는 만큼이나 한스도 인간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향을 주는 쪽은 인간만이 아니다. 말은 인간을 감응시켰고 움직이게 했다.
2. 누가 권한을 부여하는가
하지만 심리학계에서 풍스터의 연구는 실험에 개입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력을 입증한 사례로만 소환된다. 한스의 에피소드가 있은지 60년 후에 심리학자 로젠탈은 “똑똑한 한스 효과”를 입증하는 실험을 기획했다. 로젠탈은 학생들에게 일명 “영리한-쥐와 멍청한-쥐 실험”을 반복해 달라는 과제를 주었다. 영리한-쥐와 멍청한-쥐는 버클리의 실험 심리학자 트라이언이 수년 전에 수행한 실험이다. 로젠탈은 학생들에게 미로찾기에서 성적이 좋은 쥐들만 골라서 몇 세대에 걸쳐 선택교배를 하면 미로찾기를 아주 잘하는 영리한-쥐가 나오고 성적이 나쁜 쥐들만을 골라 선택교배를 하면 멍청한-쥐들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의 한 그룹은 영리한-쥐들과 실험을 했고 다른 그룹은 멍청한-쥐들과 실험을 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였다. 영리한-쥐 그룹이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실험에 참여한 쥐들은 선택교배된 쥐들이 아니라 무작위로 추출된 쥐들이었다. 실험을 위해 로젠탈이 학생들을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다. 로젠탈은 이 실험을 통해 영리한-쥐와 멍청한-쥐는 실제로 영리하거나 멍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기대, 환상 속에서 그런 것들의 부산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데스프레는 학생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를 묻는다. 로젠탈은 감정적인 요소들이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했다. 가령 학생들은 영리한-쥐들을 더 부드럽게 대했고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학생들로 하여금 영리한-쥐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했을까? 로젠탈은 학생들에게 미로찾기 성적 자체는 학생들의 성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권력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데스프레가 보기에 이는 진짜 문제를 회피하는 일이다. 그와 학생들 사이에 작동하는 힘은 권력이기보다는 권위(authority)이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에 따르면 그 누군가가 권위가 있다는 것은 그 권위의 영향권 하에 있는 사람이 그 누군가가 말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때이다. 데스프레가 보기에 학생들은 유명교수이자 권위자인 로젠탈이 말한 대로 결과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권위를 가진 것은 로젠탈만이 아니다. 쥐 또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버클리라는 명문대의 유명교수 연구실에서 온 명문 쥐들이다. 학생들은 예측한 대로 쥐들이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로젠탈의 실험에서 작동한 것은 권위이지 권력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로젠탈이 자신의 실험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오염요소를 들이대면서 로젠탈의 실험을 기각할 수 있다. 로젠탈이 말한 대로 영리한 쥐와 멍청한 쥐가 학생들이 기대와 믿음 속에나 있는 환상인 것처럼, 로젠탈의 기대 대로 실험결과를 낸 학생들 또한 권위에 영향받은 믿음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는 쥐들과 학생들, 로젠탈과 학생들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가장 빈곤하게 이해하는 방식이다.
데스프레는 이렇게 존재론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대신 권위(authority)가 하는 일에 주목한다. 권위를 가진 자는 허용하고 승인한다. 로젠탈의 권위는 그의 학생들이 유능한 실험자가 되는 것을 승인하였고(authorize) 그들이 현실세계에 미로를 잘 찾는 지능적인 쥐를 존재하게 만드는 일을 승인했다. 데스프레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로젠탈이 가진 권위의 역할을 인정한다면, 버클리 쥐로서 쥐가 가진 권위의 역할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쥐들은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이 지능적인 쥐를 만드는 것을 승인했다. 이처럼 누가 권한을 부여하는가로 질문을 바꾸면 모든 것이 변한다. 승인한다는 것은 신뢰를 보낸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로젠탈의 명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었고, 로젠탈의 기대를 자신들의 기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만큼이나 영리한-쥐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한 학생들은 쥐의 신뢰를 얻었고 그것만큼이나 쥐 또한 학생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들 간의 신뢰는 정서적으로 몸짓으로 서로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이 이들을 유능한 실험자와 영리한-쥐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데스프레가 말한 인간-동물-발생(anthro-zoo-genesis)다.
3. 길들이기
그렇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가축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데스프레는 길들이기 실천의 본질에는 신뢰가 있다고 말한다. 이 신뢰가 믿음을 재정의할 수 있게 만든다. 로젠탈의 실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믿음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세상은 다른 사람이 믿는 바를 수동적으로 믿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물으면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절합된 능동적인 주체들로 가득한 현장이 된다. 데스프레는 “믿음은 개물(個物, entity)을 사건에 사용할 수 있게(available) 만드는 것”이라고 재정의한다. 학생들은 그들의 쥐가 영리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 양쪽 모두의 정체성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길들이기는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로젠탈의 실험에서 쥐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학생들도 심지어 로젠탈마저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데스프레는 여기서 ‘사용할 수 있음(being available)’와 ‘고분고분함(being docile)’을 구분한다. 길들이기는 통상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길들이기는 있어서는 안될 나쁜 관행이고 가축은 구원자를 기다리는 종신형의 죄수로 간주된다. 하지만 데스프레는 이런 단순화에 저항하면서 인간-동물-발생의 풍성한 존재 만들기의 장을 주목한다. 이는 가축과 인간, 실험동물과 인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동물-발생의 세계 속에서 함께 잘 살기 위해서다. 따라서 길들이기를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기와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는 구분되어야 한다. 데스프레에 따르면 이 둘은 저항의 가능성으로 구분된다. 로젠탈의 쥐들은 실험장치와 자신에게 기대되는 것에 항상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실험이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영장류학자 할로(Harlow)의 애착에 관한 실험에서 원숭이들은 어떤 저항의 가능성도 차단 되었다. 갓 태어난 원숭이는 어미와 또래로부터 몇 달간 격리되었고, 이 때문에 격리된 원숭이는 병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동, 그리고 깊은 우울증을 보였다. 할로는 이로부터 애착이 원초적인 욕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실험대상인 원숭이는 실험장치에도 과학자의 기대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할로의 실험에서는 원숭이를 고문하는 명료한 실험장치만 있었을 뿐, 세계를 만드는 기호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질문은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사용가능성(availability)’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정의는 고분고분하게 만들기와 대비해서 감정적인 우려나 도덕적인 이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문제이고, 더 많이 절합된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인 질문이다. 이렇게 사용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세계와 주체를 표시하는 기호가 재분배된다. 상호적인 사용가능성에 의해 세계와 주체는 모두 활성 상태가 되고 둘 다 변형된다. 데스프레는 우리 인간이 수천 년을 이어왔고 스스로 퍼져나갈 수 있게 만든 길들이기 관행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주체와 세계가 상대방이 만들게 하는 것에 의해 절합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한스와 질문자, 말과 기수, 그리고 쥐와 학생 실험자 사이, 이 몸들이 만들어 낸 조율의 기적을 생각해 보라. 사용할 수 있게 만들기는 고분고분하게 만들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에 대한 응답이고, 복수종의 계속성을 가능하게 만들어온 유산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Vincian Despret, “The Body We Care For: Figures of Anthropo-zoo-genesis”, Body and Society 10(2-3), 2004, pp.111-134.
William. James, Essay in Radical Empiricism, New York: Longmans Green, 1958.
최유미 - 수유너머104 연구원
지식공동체 수유너머 104에서 철학과 과학학,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는 지은 책으로는 <해러웨에, 공-산의 사유>,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공저) 등이 있으며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종과 종이 만날 때>를 번역했다.